
남쪽에는 추위가 더디 온다. KTX 시네마를 타고 2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기차역이 있다. <밀양>의 주연 배우 전도연이 칸을 울린 경상남도 밀양. 한발 앞서 수확을 거친 땜통 같은 빈 자리에는, 네모난 볏짚단이 동그마니 남아있다. 쌀쌀한 새벽 기운을 흐뜨리는 아침 햇살이 퍼져간다. 논두렁의 나무 한 그루를 중심에 놓고 젊은 연극인들은, 마음껏 큰 대사와 몸짓을 뽑아낸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따라 금빛 논이 일렁인다. <은세계>를 기점으로 맞이하는 한국 연극 100년, 지역 연극의 희망을 키워가는 밀양 연극촌의 풍경이다.
금빛 논 너머 숨겨진 비단결 수면, 양양지
밀양에 도착한 아침, 가을비가 왔다. 그러나 검은 구름 내린 10월에도 밀양은 춥지 않았다. 밀양역을 빠져나와 시립박물관으로 택시를 탔다. "서울에서 오셨는갑다." 한적한 시내의 간판들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자 택시기사가 말을 건넸다. "밀양은 전도연 씨 상받기 전부터 관광지로 유명했어예.”
지어진지 1년이 채 안됐다는 시립박물관 앞에 객을 내려주고, 어느새 기사는 차를 돌려 떠났다. 시립박물관은 독립운동기념관과 유물, 시대별 화석 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시대 자기류, 공룡의 뼈를 조립해놓고 지질을 분석하는 등 시대구분을 오가는 현대적인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떠나 식사를 하러 떠나는 자리에는 밀양의 문화해설사 김재순 씨가 함께했다. 공직생활을 30년 하고 퇴직 후 해설사로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벼농사와 깻잎품종, 콩 품종 등 농학박사들이 모여 미래식량자원을 연구하는 농업시험장이 차창 밖으로 이어졌다.
산내면 남영리 얼음골에 도착할 무렵에는 톡톡 떨어지던 비도 그쳤다. 얼음골은 여름에 얼음이 얼고 겨울에 얼음이 녹는 특이지형이다. 더웠다 추웠다 일교차가 심한 고랭지의 과일들은 맛이 좋다. 언덕 위의 과수원에 발이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올라섰다. 첫서리가 오고 11월 10일 당도가 최고에 이른다는 사과를 따기 위해서였다.
농부였던 남편을 따라 2년 전 귀농한 황보송민씨는 "여기 사과는 5~6할이 다 개인택배로 나가요. 친환경저농약으로 제초제를 하나도 안 씁니다."하며 사과자랑을 했다. "표면이 거칠고 맑고 투명한 사과, 고(사과 높이)가 높을 수록 좋은 사과예요. 흠이 없어야하고요." 사과따기 체험을 하는 관광객들에게 사과즙을 하나씩 들려주며 조언도 했다.
얼음골을 빠져나오자, 허리까지 올라오는 금빛 논 사이로 농부가 벼를 털어내 볏짚을 묶고 있었다.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양양지로 향했다. 밀양 8경의 하나라는 양양지에는, 석양이 내릴 무렵 절경을 이룬다는 이팝나무가 희끗희끗 보였다. 반드르한 수면은 맑다기보다 기름져, 오장육부 게워내 몰래 흘린 눈물까지 윤활유로 바른 듯 했다. 수채화보다는 보석 걸린 비로드의 유화였다. 신라시대 축조한 저수지로 영화 <오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 뭘 먹을까 : 참샘농원의 허브비빔밥에는 새싹과 허브가 들어간다. 매실고추장을 넣고 다홍빛 한련화를 띄워낸다. 예약을 하면 로즈 잎에 삼겹살을 구워먹거나 허브를 넣은 오리백숙을 먹을 수 있다. "4,5월이 꽃이 좋아요. 나무들은 20년 전부터 있었고, 15년 전 한국 허브 유행이 일던 초창기부터 취미생활로 시작했습니다." 농장주 손정태 씨의 설명이다. 물레방아며 박을 뜯어먹는 토선생, 작은 다리, 레일바이크, 도자기 제작터까지 아기자기 갖췄다. 농장체험으로도 손색 없다. 허브비빔밥 1인분 6천원. 055)391-3825 초동면 봉황리 소재.


젊은 연극인들 오롯이 연극에 몰두하는 연극촌
연극촌에는 운동장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극장들이 있다. 동네 극장, 창고극장, 브레히트 극장, 숲의 극장 등 객석 수를 달리한다. 극작가 윤대성 씨, 연출가 이윤택 씨, 인간문화재 춤꾼 하용부 씨를 비롯 연극인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집들도 있다. 한양대에서 500권을 기증받아 만들었다는 연극자료관 뒤편에는, 대연습실이 있어 젊은 연극인들이 오갔다.
'연극계의 스파르타'라는 밀양 연극촌에 기꺼이 투신하는 젊은 연극인들. 게스트하우스의 청소며 식사 준비, 설거지까지도 이들이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다.
"집이자 직장, 그리고 공연장이죠. 모여서 장기간 작업하는 작업의 특수성도 잇고요. 대학로 이런 곳에서 연극인들은 많이 힘들어요. 월 수입이 몇 십만 원 이런 식이죠. 경제적 난점을 타개하기 위해 여기 모여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영 기획자가 객들을 이끌며 설명했다. 소박한 밥상과, 덩그러니 침구만이 놓인 숙소를 두고도, 감히 불평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동네 극장에서 연극 한 편을 보고, 여행객들은 운동장에 불을 피워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낯선 객들은 연극인들을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며 빠르게 섞여 들었다. 함께 시공간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친밀감이었다. "이렇게 평소에 연구를 많이 해요. 잘 봐두고 고민했다가 다음에 연기할 때 이렇게 해봐야지 하고.." 극 중에서 올누드로 자살소동을 벌였던 역할의 배우가,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연극 조명은 대낮처럼 환하게 술자리를 밝혔다.
마주보는 방들을 여럿 두고 주방과 식당이 딸린 게스트하우스. 초중고, 대학생들이 문화체험으로 다녀가는 경우가 많기에 유용하다. 해마다 개최하는 밀양연극제 때에는 공연팀들이 묵어가기도 한다. 50여 편이 무대에 오르는 연극제에는 관객이 3만 명에 이른다. 주말에는 1시간 이내에 있는 부산, 대구 지역에서 가족 단위로 들리기도 한다. 주말극장 관객은 평균 200명에 달한다고 했다.
하룻밤을 묵고 난 밀양 연극촌, 새벽 공기는 찼다. 운동장의 자갈을 밟으며 산책길을 따라 나섰다. 아침 논 앞에서도 연극인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대본 연습을 하고 몸을 풀고 있었다. "이렇게 젊은 연극인들이 있다니 희망을 봅니다"라던 관객의 감회는, 극장 밖 논밭에서 털어놓아야 제격일지도 몰랐다.
* 뭘 볼까 : <서툰 사람들> 스물 다섯 살 혼자 사는 여교사의 집에 도둑이 들고, 가족과 이웃이 끼어들며 긴장감이 고조된다. 도둑과 교사는 아웅다웅하다가 친구가 된다. 아슬아슬 계급과 성별을 건드리지만, 위험한 감정선을 넘지 않고 납득 가는 대단원에 이른다. “왜 손석희야. 난 손석희 싫어. 유재석으로 해!”라는 짧은 대사에 연극적 지향점이 녹아 있다. 밀양연극촌. 부북면 가창리 소재. 체험 및 티켓 문의 055)355-2308 http://stt1986.com


하늘하늘 여행길 간질이는 재약산 억새
둘째 날 오전, 여행객의 반이 호박소로 떠나고, 남은 반은 재약산의 억새를 보러 향했다. 아직 단풍이 오지 않았다는 재약산은 군데군데 얼룩덜룩했을 뿐인데도 굽이굽이 도는 길마다 절경이었다. 광대한 벽처럼 하늘을 가리고 선 험한 산세는, 그 위에 누릇불긋한 단풍을 맞이해 더없이 고왔다. 정상 가까이에는 늪지를 덮은 억새가 흐른 땀을 매만지듯, 부드럽게 출렁였다. 겨울차비를 앞두고, 길게 자라난 식물의 털옷이 하늘하늘 입가를 간지럽혔다.
재약산을 내려와 신라 무열왕 때(654년) 원효 대사가 창건한 표충사에 발길을 했다. 고승들과 사명대사가 자리했던 유적지가 남아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으로 떨쳐 일어난 사명대사, 그 조상의 묘가 표충사 뒷자락에 있으며 현재까지 표충사에서 돌보고 있다. 창건 당시 '죽림사'라는 이름이었다. 재약산을 병풍으로 두른 사찰 뒤편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밀양 역으로 돌아오며 마지막으로 올라선 누각은 영남루였다. 밀양 아리랑의 유래가 된 아랑 설화가 맺혀있는 오래된 누각이었다. 멀리서 택시를 타고 지나도 한눈에 들어오는 빛깔이 요즘 것이 아니다. 벽사진경을 새긴 귀문과 조선시대 부사의 어린 자식(1843년 이인재 부사의 11세, 7세 자식)들이 쓴 명필의 현판이 살아있다. 신라시대 건립해 조선시대 재건축한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 3대 누각으로 일컬어왔다. 일제시대의 상흔까지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있네. 저 건너 대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은 넋이 애닲으다" 낙동강의 끝자락이 닿는 밀양강변에 밀양의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꽃다운 나이에 죽어 원한으로 맴돌았다는 아랑은, 밀양아리랑을 남기고 갔다. 세마치장단으로 경쾌하다는 밀양아리랑. 배우 전도연과 연극촌 이전부터, 아랑은 밀양을 충절과 문화의 고장으로 이끌었던 곱고도 절개 있는 넋이었다.
* 뭘 먹을까 : 흑염소가 점점이 풀을 뜯는 논밭, 밀양댐을 지나 점심식사를 하러 간다. 밀양시 관광안내서에 추천맛집 맨 머리로 올라있는 <약산가든>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양 깻잎에 흑염소를 재워넣은 불고기를 싸먹는다. 밀양의 햇살을 받아, 조물한 크기에 야들하게 퍼지는 건강식이다. 비빔밥에 동동주, 묵 무침까지 한 상으로 받으면 꽉찬 식사다. 흑염소 불고기 한 접시 4만원. 비빔밥 별도. 055)352-7786 단장면 구천리 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