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기슭의 경상남도 산청. 가야 마지막 왕의 돌무덤인 구형왕릉, 최씨 일가를 비롯해 유교문화 양식을 보여주는 한옥 마을,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를 기리는 한의학박물관이 모여있다. 질긴 역사의 흔적 속에 한국에서 기가 제일 센 지형이라 하여 한국의 국새전각전도 이곳이다. 첫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5일 고속버스로 서울에서 세 시간을 달려 산청군에 닿았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돌무덤과 국새전각전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왕산 기슭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계단식 돌무덤이 남아있다. 가야 제10대 임금 구형왕의 능이라고 전하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경사면에 7단의 돌이 쌓여 정상에서는 타원형을 이룬다. 동쪽 중앙에 감실이 있으나 내용물은 없다. 1798년 아래 골짜기의 왕산사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유물을 발견한 이래 가야국왕릉이라고 추측해왔다.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넘겼다고 하여 양왕이라고도 불리웠으나,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다 숨을 거두며 '어찌 흙 속에 묻히겠느냐, 무덤을 돌로 덮어달라'고 청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의 자손은 김유신으로 김해 김씨 문중에서 무덤에 찾아와 제사를 지낸다. 진실을 알 수 없는 돌무덤은 우리 고대사의 중요 사적으로 인정받아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방문객들을 모두 날려버릴 듯한 기세의 눈보라는 특리의 국새전각전까지 이어졌다. 지리산 동북쪽과 백두대간의 끝자락이다. 산청에서 나오는 고령토가 국새 거푸집의 필수 재료가 될 수 있었기에 이곳에서 국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옛날 옥새를 만들던 전통적인 기법으로 민홍규 장인이 4대 국새를 제작했다. 기가 센 지형이라 해서 '기 받는 관광지'가 되었다.



명의가 찾아헤맨 지리산 약초와 당귀꿀차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정은, 한의사 유의태와 허준이 의술을 펼쳤던 역사를 기린 전통한방휴양관광지에 이르러 겨우 누그러들었다. 2007년 5월에는 산청한의학박물관이 개관해 전통의학과 약초를 전시한다. 허준이 명약을 얻어낸 이야기를 3D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사람에게 침묵하던 신비의 세계가 문을 연 것은, 왕도 국가도 아닌, 사제간에 이어진 생명에 대한 경외였다.
금서면을 떠나기 전에 점심식사를 한다면 구형왕릉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자리잡은 왕산산장식당에 들리자. 6천원 정식에 지리산에서 채취한 취, 피마자 이파리, 뽕잎, 토란줄기 등의 약초를 기본 열 가지로 삶아 산뜻한 찬이 나온다. 일교차가 높은 지리산의 약초는 향이 세다. 꽃이 떨어지자마자 따와 조림간장을 부었다는 산초는, 동글동글한 모양새에 허브처럼 강한 향이다.
1만 5천원 정식에는 피래미찜과 수육이 곁들여 나온다. 식사 후 당귀밭에서 직접 재배한 당귀를 꿀에 3-5일 절인 당귀꿀차의 따스함이 진정 산청의 기다. "이건 아무것도 아녜요. 10가지는 더 만들어" 하는 주인장은 산청의 토박이로, 지리산을 스승삼아 배도라지차와 오미자차 등 차 연구를 하고 있다. 문을 나서는데 김장용 배추가 집 뒤켠에 가득이다.



산청군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오면 단성면 남사리에 전통한옥이 집단으로 보존된 남사예담촌이 있다. 뭇 집성촌과 다르게 성씨가 달라 토담을 높게 쌓았다. 저만치의 능선을 따라 흐르는 토담 위에는 기와를 촘촘하게 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최씨 고가는 1930년대에 지어졌는데 대문을 지나 사랑채와 안채, 텃밭으로 이어지는 중층 구조가 인상적이다.
아들 중심의 출산 통제나 시집가는 딸이 잡고 울었다는 대들보는, 본질을 잊은 채 고가를 폐가로 이끈 인습이다. 그러나 처마 끝에 달린 발간 곶감과 대청 마루 밑에 몸을 누인 백구, 청량한 풍경 소리는, 허울 좋은 뼈대를 지킨 알맹이가 속살같은 가족애였음을 나즈막히 들려준다. 조선은 가장 낮은 애정에서 중첩적으로 문을 닫은 구조로 만들어진 나라였다.
고가마을 입구, 사람보다 오래묵은 은행나무는 알고 있다. 상등품 아닌 감을 반쯤 말린 감말랭이를 하나씩 심심풀이로 꺼내먹으며 전통숙박체험으로 머문다면, 현대인을 온통 떠밀어 버릴듯한 거센 바람과 허영 많은 계보를 뚫고 수줍은 진심이 스민다. 돌무덤 아래 숨은 왕조의 비밀이나 지리산 약초의 신비, 나라를 이어 온 산청의 기도 그때에 온다. 문의) 산청군 문화관광과 055)970-6421~3





